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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익진 (법조인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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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본문

김익진(金翼鎭, 1896년 8월 9일 ~ 1970년 9월 17일)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입니다. 제2대 검찰총장을 역임했습니다.
생애 및 경력:


  • 1896년 8월 9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출생했습니다.
  • 경성전수학교(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)를 졸업했습니다.
  • 1918년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법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.
  • 1920년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1921년부터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했습니다.
  • 이후 공주지방법원, 함흥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근무했습니다.
  • 1927년 판사직을 사직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습니다.
  • 변호사 시절 민족주의, 계몽주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재야 법조인으로 활동했습니다.
  •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나,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.
  • 월남 후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대법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습니다.
  • 1949년 제2대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.

검찰총장 재직 시절:

  • 이승만 대통령의 뜻과 달리 '대한정치공작대 사건'을 수사 및 기소하여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.
  • 국정감사 거부로 국회에서 파면 건의를 받기도 했습니다.
  •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되는 인사를 겪었습니다.

말년:

  •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.
  • 1970년 9월 17일에 사망했습니다.

기타:

  • 김익진은 헌정 초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.
  • '대한정치공작대 사건' 수사 지휘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로, 부당한 정치적 간섭에 맞서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.


김익진 (법조인) - [인물]에 관한 문서
기본 정보
이름김익진
원어명金翼鎭
국가대한민국
직책검찰총장
대수2
임기1949년 6월 6일 ~ 1950년 6월 21일
출생지대한제국 충청남도 부여군
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대저택
본관안동
학력경성전수학교 법학 학사
경력
가족
부모아버지: 김일규, 어머니: 능성 구씨
자녀장남: 김증한
차남: 김창한
삼남: 김흥한
친인척사위: 장상건
사위: 허진규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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